담양의 역사

담양(潭陽)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담양도호부조(潭陽都護府條)에 이르면, 「본래 백제(百濟)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는데 신라때 추성군(秋成郡)이라 바꾸었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담주도단련사(潭洲都團鍊使)를 두었다가 후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나주에 복속하게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 3년(1391)에 율원현(栗原縣)을 겸임케 하였다. 본조(朝鮮)에 들어와 태조 4년(1395)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공정왕(정종) 즉위1년(1398)에 왕비 김씨의 고향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시키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본 담양군은 담양읍과 고서(古西)ㆍ금성(金城)ㆍ남(南)ㆍ대덕(大德)ㆍ무정(武貞)ㆍ대전(大田)ㆍ봉산(鳳山)ㆍ수북(水北)ㆍ월산(月山)ㆍ용(龍)ㆍ창평(昌平)의 11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현재의 담양군의 행정구역을 이루는 중요한 골격의 형성은 1914년 일제에 의해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조처일 것이다. 즉 이때 담양군과 창평군을 합하여 담양군을 이루고 창평군 관할이었던 옥과면(玉果面)은 곡성군(谷城郡)에 이관시키며 그밖에 현 대전면, 수북면이나 남면을 이루는 지역은 광주시와 장성군의 관할에서 이속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근세 이전의 담양군을 이루는 지역은 크게 보아 담양과 창평의 두 개의 행정단위로 나뉘어 존속해 왔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 및 삼국시대(백제)

2001년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대덕면 매산리와 월산면 광암리 지역에서 구석기(舊石器)시대의 유물인 뗀석기 등이 발견되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우리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은 대전면 72기·무정면 82기 등 모두 240여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이들 지역에 정치적 사회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봉산면 제월리(齊月里)에는 석촉·석검·저석(숫돌)·석부(石斧) 등 유물이 출토된바 있고, 무정면 강쟁리(현 담양읍)에서는 석검과 석부가, 담양읍 일대의 석관묘에서는 잔무늬거울·세형동검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아직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삼한 중 마한(馬韓)에 속했던 우리지역에 마한소국들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예컨대 지금의 무정면 일대에 구소국(拘素國)이, 창평면 일대에 구해국(拘奚國)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그것인데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달라 확실치 않다. 다만 영산강 상류지역의 고인돌의 분포상으로 보아 일찍부터 정치적 사회단체가 존재하였다는 것만은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전남지방을 지배하는 시기는 근초고왕 24년(369)경으로 담양지역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영역에 포함되면서 현재의 담양지역에는 추자혜군(秋子兮郡)과 율지현(栗支縣)이, 창평지역에는 굴지현(屈支縣)의 존재가 찾아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보이는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방(方)-군(郡)-현(縣)제로 대별되는데 담양도 이와 관련, 통치조직의 근간을 이루었을 것이다. 3군현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추자혜군(秋子兮郡)이 현재의 담양읍과 무정면(武貞面) 일대, 율지현(栗支縣)은 현재의 금성면(金城面) 일대, 굴지현(屈支縣)은 현재의 창평면(昌平面), 고서면(古西面) 일대로 추정하나 개략적이어서 수정될 여지가 없지 않아 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신라가 지방제도 체제를 정비하기 전에 당(唐)에 의한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진다.
즉,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7주 51현을 설치하였다는 것인데 담양지역과 관계가 되는 것은 분차주(分嵯州)이다. 분차주(分嵯州)의 속현(屬縣)인 고서현(古西縣)은 옛 추자혜(秋子兮)에 두어졌다 하므로 이는 대체로 담양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경덕왕 16년(757) 대대적인 지방통치조직 개편과 군현명 개정 작업이 이루어진다.

① 추성군(秋成郡)은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명칭을 바꾸었고 지금은 담양군이라 한다. 영현(領縣)은 둘이다. 옥과현(玉菓縣)은 본래 백제 과지현(菓支縣)인데 경덕왕이 명칭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율원현(栗原縣)은 본래 백제 과지현(菓支縣)인데 경덕왕이 명칭을 바꾸었다. 지금은 원율현(原栗縣)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 3, 추성군(秋成郡))
② 무주(武州)는 본래 백제땅이다. 신문왕(神文王) 6년에 무진주(武珍州)라 하였고 경덕왕이 무주로 바꾸었다.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영현(領縣)이 셋인데 ……, 기양현(祁陽縣)은 본래 백제의 굴지현(屈支顯)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의 창평현(昌平縣)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 3, 무주(武州)) 백제 때와는 분포상의 변화는 없으나 명칭의 변화만이 보인다.
지금의 담양지역에는 추성군(秋成郡)과 율지현(栗支縣)이 있고 추성군은 예하에 지금 곡성군 지역인 과지현(菓支縣, 현 玉果)과 금성면 지역인 율원(栗原, 현 原栗)을 영속하며, 창평지역의 굴지현(屈支縣)은 기양현(祁陽縣)으로 개명되어 무주(武州)의 영현으로 나타난다.
한편 경문왕 8년(868), 왕의 발원에 의하여 건립되었다는 개선사(開仙寺)의 석등이 현재 남면 학선리에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이 지역에 불교문화가 융흥(隆興)하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

태조 23년(940)에 기양현(祁陽縣)이 창평현(昌平縣)으로 개칭되고 율원현(栗原縣)이 원율현(原栗縣)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생기는데 추성(秋成)을 비롯하여 창평(昌平), 율원(栗原) 등의 여러 현이 무주의 영현으로 편제되는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 후 성종 14년(995) 추성군을 고쳐서 군사적 의미가 강한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鍊使)를 삼는 조처가 이루어지나 시행 10년만에 폐지되고 현종 9년(1018) 새로운 군현제도가 이루어진다.
이때 담양군은 나주목(羅州牧)의 속군(屬郡)이 되었으며, 원율현과 창평현도 나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대에 이르러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명종 2년(1172)에는 담양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나 고종 24년(1237) 원율현인(原栗縣人) 이연년(李延年)이 반란을 일으키자 율원이 폐현되는 등 여러번 강등을 거듭하나 공양왕 3년(1391)에 담양 감무(監務)가 원율현을 겸임케 하는 조처가 이루어진다.
한편 몽고침입기에는 몽장(蒙將) 차라대(車羅大)가 담양에 둔소(屯所)를 설치하고 주둔하는 등 담양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우선 태조 4년(1395) 담양이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관(監務官)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는 조치가 취해지고, 1399년 공정왕(정종)비 김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하였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쳐졌다. 세종 17년(1435)에는 창평의 관할이었던 장평(長平)·갑향(甲鄕)의 향·부곡이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의 영역내에 들어와 있다하여 이를 담양에 병합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조선초기의 개편에서는 담양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이는 그 군사적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정적 편제는 한말까지 대체적으로 큰 변화 없이 유지되나 몇 차례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곧 복구된다. 강등된 경우는 영조 4년(1728) 역적 미구(美龜)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된 일, 영조 38년(1762) 좌수(座首) 이홍범(李弘範) 등이 역적을 도모하였다 하여 강등되었으며, 창평현은 성종 5년(1474) 창평 출신인 강구연(姜九淵)이 현령(縣領) 전순도(全順道)를 능욕하였다 하여 광주로 예속되었다가 성종 9년(1478)에 복구된 일이 있다.

조선시대 하부조직으로 면리제(面里制)을 들 수 있는데 영조 35년(1759)에 작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정조 13년(1789)에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담양부는 총 15개면에 5,532호(戶), 18,242구(口)의 규모였고, 창평현은 10개면에 1,999호(戶), 7,292구(口)였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담양부가 20개면 5,688호(戶), 18,270구(口), 창평현이 10개면 2,041호(戶), 7,601구(口)로 나온다.
 

근대이후

1895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전국을 23부의 체제로 나누었는데 담양과 창평은 남원부(南原府) 산하 20개 군중 하나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1896년 13도제로 변경하자 담양군과 창평군은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면서 담양군은 2등군, 창평군은 4등군으로 되었다.
1906년 창평군 갑향면(甲鄕面)을 장성군으로 이관시키고 1908년에는 담양군의 덕면(德面)·가면(加面)·대면(大面)이 창평군으로 이관되고 옥과군이 폐지되어 창평군에 이속되는 변경이 있었다.

1914년 일제는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개편을 단행한다. 이때의 담양지역 행정체제 개편을 보면 창평의 옥과면은 곡성군으로 이관시키고 창평의 군내면(郡內面)·고현내면(古縣內面)·내남면(內南面)·외남면(外南面)·서북면(西北面)·장남면(長南面)·동서면(東西面)·장북면(長北面)·덕대면(德大面)·가면(加面)과 장성군의 갑향면(甲鄕面), 광주군의 갈리면(葛利面)과 대치면(大峙面)을 담양에 합속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 면간의 통폐합 및 개명작업도 이루어져 담양군의 동·서면을 담양면으로, 목(木)·두(豆)·우(牛)면을 구암면(九岩面)으로, 광(廣)·산(山)·고(高)면을 월산면(月山面)으로, 고(古)면·천(泉)면을 금성면(金城面)으로 개명하였으며, 창평군의 고현내(古縣內)면·북(北)면·서(西)면을 고서면(古西面)으로, 내남(內南)면·외남(外南)면을 남면(南面)으로, 대(大)면·덕(德)면을 대덕면(大德面)으로, 장북(長北)·장남(長南)·동서(東西)면 및 광주의 갈전(葛田)면을 합쳐 수북면(水北面)으로, 광주의 갈전면 일부와 대치면, 장성군의 갑향면을 대전면(大田面)으로 통폐합하여 13면 139개리를 관할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1918년에는 다시 면별 일부 면의 합속을 행하여 무면(武面)과 정면(貞面)을 합하여 무정면(武貞面)으로, 그리고 구암면(九岩面)을 봉산면(鳳山面)으로 고쳐 12면 체제를 이루었다.

1943년에는 담양면이 읍으로 승격됨으로서 1읍 11면의 체제를 이루었고 1955년에는 광주(광산군)의 석곡면(石谷面) 덕의리(德義里)·충효리(忠孝里)·금곡리(金谷里)를 남면에 편입하였다가 1957년에는 다시 광주 관할로 되돌려주었고, 1983년에 또 다시 행정구역의 조정을 이루어 봉산면의 강쟁리(江爭里), 무정면의 오계(五桂)·반룡리(盤龍里), 금성면의 금월(錦月)·삼만(三萬)·학동리(鶴洞里), 월산면의 운교(雲橋)·삼다(三茶)·가산리(佳山里) 지역이 담양읍으로 편입되었다.
1976년에는 광주호의 건설로 남면의 학선리(鶴仙里) 일부 지역이 수몰되었고, 같은 해 담양호의 건설로 용면의 도림(道林)·월계(月桂)·산성(山城)·청흥(淸興)·용연리(龍淵里)의 일부지역이 수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