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전설/설화

담양의 평양감사와 죽엽청주

평양감사가 나주 목(牧)을 다녀서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면서 가는 길에 우리 담양부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주를 출발해서 평양을 가기 위해서 오다보니까 어둔 밤이 되어 담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평양감사라면 엄청난 직위에 있었던 분이죠. 그 양반을 모시고 그 날 저녁에 흥을 돋구기 위해서 담양부사는 죽엽주를 내놓았답니다. 그때 우리 담양에는 죽엽주가 나왔답니다. 처음으로 그 죽엽주와 마침 그때 음력 5월 달이기 때문에 많은 죽순이 나오는데 죽순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그 양반에게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죽엽주에 죽순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떠나면서 가지고 간 것이 죽엽주와 죽순을 가지고 올라갔답니다.
그런데 가지고 올라간 술은 남아있는데 죽순이 떨어졌답니다. 동지섣달 한 겨울에 함박눈이 내리는데 평양감사께서 하는 이야기가 신하들에게

"여봐라. 어디서 그 죽순을 구할 수 없느냐? 죽순이 있으면 조금만 구해보아라"

그렇게 명을 내렸다 합니다. 그때 무슨 죽순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양반이 입맛만 다시고 있다가 끝내는 어떻게 하셔서 자셨냐 하면 바구니를 걷어서 바구니를 물에다 푹 끓여서 그 끊였던 물을 마셨다는 참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곁들여서 죽엽청주가 우리 담양에서 제일 많이 나왔는데 죽취일(竹醉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음력으로 5월 13일 날을 전후로 해서 비가 제일 많이 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때 우리 담양에서는 온 마을에서 나와서 대를 심었습니다. 그때 이미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담양에 대밭이 없는 마을은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마을이고 대밭이 다 있었습니다.
무려 담주리나 천변리에도 대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만 그러나 지금도 11개소인가 12개소 마을에 대가 없다는 그런 비공식적인 통계도 나왔습니다만 그때는 전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대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시 하는 이야기가 마을 있는 곳에 대밭이 있고, 대밭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전에 이 대를 심고 나서 오후에는 그 죽엽주를 마시면서 마을마다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자료제공자 : 이해섭, 정보출저 : 담양설화(2002), 저작권자 : 이해섭

죽엽주가 생긴 사연

어느 부잣집에서 밥해 놓은 것이 어쩌다 잘못되게 놔둔 것이 쉬어버렸습니다.
한 여름인데 그러니까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가 그 밥을 가져다가 대밭에다 버려버렸습니다. 그리고 떨어진 대잎으로 그 밥을 덮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주인 마님이 알게 되면 노발대발하고 난리가 날 것 같으니까요.
그때는 우리 담양에도 지금 15년, 20년 전까지만 해도 대밭을 황금밭이라했죠. 또 돈밭이라 그랬죠. 그래서 대밭은 엄청난 경제적 힘을 도와줬던 그야말로 황금밭이죠.

하루는 마님이 대밭을 순찰을 했습니다. 집 곁에 있는 대밭을 담뱃대를 들고 돌아보는데 어디선가 향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밭에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향내가 나나 해서 또 한번 돌아보니까 그 자리에만 오면 향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들고 있던 담뱃대를 가지고 그 향내나는 그 곳을 전부 치워놓고 보니까 하얀 쌀밥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거기에서 향내가 나면서 그 향과 더불어 술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것이 바로 지금의 죽엽청주입니다.

주인 모르게 버렸던 밥이 뜻하지 않는 술로 변하자 주인 영감은 대잎을 원료로 해서 술을 만들게 되어 그 후 이름을 죽엽청주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자료제공자 : 이해섭, 정보출저 : 담양설화(2002), 저작권자 : 이해섭

세 대신들의 애틋한 사연

 담양읍 백동리 3구를 신기리라 부른다. 그러나 현 신기리는 일제 시대인 1930년대에 일본인이 명명한 이름이다. 새로 터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기리라 부르기 훨씬 전에는 「고사리등」 이라 이름하였다. 이를 한문으로 적어보면 높을 고, 선비 사, 관리 리, 오를 등, 「高士吏嶝」으로 나온다. 이를 풀이하면 「높은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등용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재의 고장이다.

그럼 지금부터 고사리등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세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들어본다. 장원급제한 세 사람은 조정에 들어가 착실한 관직생활 끝에 모두가 높은 자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다. 이들 세 관리들을 그 동안 지켜본 상사가 하루는 세 사람을 위하여 잔칫상을 차려놓고 술을 권하며 즐거운 자리를 만들었으나 이들 세 사람은 끝내 웃지 않자 이를 지켜보던 높은 분이 그들에게 물었다.

" 내가 그대들의 웃음소리나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도대체 그대들이 똑같이 웃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이며, 사연이 어떻게 된 것인지 오늘은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해보세. 먼저 내 오른쪽 상머리에 앉은 김 아무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 해보지."

"예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신이 평생을 두고 웃지 못하는 사연은 다름 아니라 결혼식을 마치고 처가 집에서 사흘 간을 지내고 처와 함께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태풍이 불기 시작하자 배 안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배의 선장이라고 자칭한 사람이 외쳤다.

'여러분! 저의 말을 잘 들으시오.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에는 큰 죄인이 있으니 죄인을 찾아내어 용왕께 바치지 않으면 이 배에 타고 있는 수백 명이 함께 몰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저고리를 벗어 한 사람 한 사람씩 바다에 던져 주십시오. 차례대로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죄인의 옷은 물 속으로 가라앉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의 옷은 그대로 물에 떠 있습니다.'

배에 탄 그 많은 사람들이 윗저고리를 모두 던지고 마지막 두 사람이 남았다.
마지막 두 사람은 높은 관리직에 있는 김 아무개와 그의 아내다. 선장의 지시에 따라 김 아무개가 먼저 윗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옷은 그대로 파도를 따라 떠내려갈 뿐이다.
마지막 한 사람. 그는 김 아무개의 아내이다. 심하게 흔들리는 배. 모든 사람이 빨리 윗저고리를 바다에 던지라고 재촉하였다. 이 때 두 신랑 신부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저고리를 벗어 바다에 던졌다.
옷이 바다에 떨어지자마자 웃옷은 조용히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았다. 선장은 신부가 빨리 바다에 몸을 던질 것을 강요했다. 신랑과 마지막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신부는 폭우 같은 눈물을 흘리며 치마를 머리에 둘러쓰고 바다에 뛰어들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단다.

김 아무개는 "신행 길에 이와 같은 일을 당하고 소생 어찌 웃음이 있겠습니까?"

하니 그 상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연 웃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박 아무개에서 물었다. "그대가 웃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고?" "예!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박 아무개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김 아무개와 같이 관직에 있으면서 결혼식을 올린 후 관청에 처음으로 등청하던 날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처에게 첫 등청이니 다녀오겠다고 방문을 나와 토방에 있는 신을 신으려는 순간 두루마기의 끝을 방에서 당기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처의 행위를 꾸짖고 몇 차례 두루마기의 끈을 당기면서 놓아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방안에 있었던 처는 끝내 옷고름을 놓지 않았다. 신부의 그런 행동을 크게 꾸짖고 그 날부터 일체 그 방에는 출입을 단절하고 처와 연을 끊고 괘씸한 처의 행위를 탓했다. 그 후 한 달이 가까운 어느 날 신부가 신방에서 나오지 않아 가족들이 신방의 문을 열려고 애를 써봐도 문이 열리지 않자, 신랑이 와서 신부의 방을 열어본 것이 어떠하겠냐는 여러 어르신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신랑은 문고리를 잡아당기었다.
그런데 머리를 산발한 신부가 눈을 뜨고 죽어있지 않는가?
그리고 무릎 앞에는 한 장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서방님! 너무나 억울하옵니다. 두루마기의 옷고름이 문고리에 걸려 끝내는 떨어졌을 분 어찌 등청하는 서방님의 옷고름을 감히 잡아당기겠습니까?"
그때까지도 떨어진 옷고름이 문고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제야 사실을 알게 된 신랑은 아내의 억울한 사연을 읽어보고 대성통곡 하였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리 고개를 끄덕이며 " 과연! 그러하겠구나. 다음은 이 아무개 자네의 사연을 들어보세."
"네 저의 사정은 살아온 것은 어머님을 위한 것이요. 또 어머님은 평생을 이 못난 소생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하며 그는 말을 꺼냈다.

10여년간 어머님의 갖은 고생 끝에 착실히 공부를 마치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떠나는 아침에 어머님이 손수 들고 들어오는 밥상은 진수성찬에 평생을 두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하얀 쌀밥!
그 쌀밥은 어머님께서 부잣집에 일을 다니면서 나락을 절구통에 넣어 도구질 하면서 떨어진 쌀 한 알, 한 알을 주워 10년간 착실히 간직하다가 과거시험을 치르는 아들에게 한 그릇의 흰쌀밥을 해 오셨다.
그러나 과거시험 길을 떠나는 아들은 그 동안 어머님의 고생이 눈앞을 가렸다.

" 어머님! 저 흰 쌀밥은 꼭 어머님이 드셔야 합니다. 소생은 배가 부르니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프면 도시락밥을 먹겠으니 어머님이 드셔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끝내 사양하면서 떠나려는 자식을 붙잡고 수십 차례 권한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어머님이 드셔야 합니다." 하며 꼭 어머님께 아들을 대신해서 맛있게 드실 것을 간곡히 권하면서 두 모자는 아쉬운 이별을 하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이 아무개는 과거시험에 당당히 급제하여 놓은 관직에 부임하였다. 이제는 어머님을 편히 모시고 장가도 들고 마지막 어머니의 영생을 즐겁게 지내도록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그의 집을 찾았다.

"어머님, 이 불효자식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아무리 불러도 어머님의 대답은 없었다.
주위를 살피니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작은 토방에 어머님이 신고 다녔던 짚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들은 어머님이 방안에서 주무시는 줄로만 알고 "어머님"하고 외치면서 방문을 열어보니 어머님이 눈을 든 채 밥상 앞에 앉아 죽어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머님이 쳐다보고 있는 흰쌀밥은 그때까지도 따뜻한 김이 나면서 밥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쌀밥한번 먹어보지 못한 자식을 위해 정성껏 마련한 어머님의 그 따뜻한 정을 어머님께 적으나마 되돌려주겠다는 자식의 심정이 전달되지 못하고 어찌 소생에게 평생을 두고 웃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리, 이제야 소인들의 말못한 그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십시오."

"그래, 그대들의 깊은 사연을 듣고 보니 나 역시 눈물이 앞을 가리며, 깊은 동정이 절로 나니 이제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국가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네."
자료제공자 : 이해섭, 정보출저 : 담양설화(2002), 저작권자 : 이해섭